알코올의존 회복자님의 단주 수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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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제작관리자 작성일21-02-01 11:12 조회4,030회 댓글0건본문
회복수기
내가 처음술을 접했을 때가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쯤.... 아버지의 막걸리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사오면서 주전자에 입을 대고 먹어봤던 것이 처음인 것같다. 그 당시 베이비부머 세대에 다들 그렇겠지만 내가 살던 곳은 어촌이라 비나 바람이 불면 배들이 나가지 않아서 술집에 모여 술판을 벌이던 것이 거의 일상인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난 크면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 맹세하고 또 맹세했지만 내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못했다.
18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나는 8남매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들을 보살펴야하는 입장이라 무슨 일이던지 돈이 된다면 다 했었다. 심지어 싸움까지도... 그러다 누나가 2년 뒤 결혼을 하게 되어 시집을 간 후 혼자서 살림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차츰 술을 접하게 되는 기회가 많아졌고 막내 동생이 5학년이었던 즈음 나는 결혼이란 것을 했다. 그 당시 아이들도 태어났고 트럭운전을 하다 큰애가 태어나면서 택시운전을 했다. 그때 부지런히 돈도 벌었지만 운전사들이 새벽에 일을 마치면 자연스럽게 술집으로 향하였고 그 당시 나 또한 술을 제일 많이 마셨던 것 같다. 동생들이 하나둘씩 시집 장가를 가서 장애인인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어쩌면 내가 동생들 뒷바라지를 다 하는 동안 못했던 것이 술로 폭발을 했었고 그 바람에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 이혼한 마누라가 죽고 아이들이랑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장애인인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무척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시기 위해 일을 했고 차츰차츰 술도 늘어만 갔다. 어떤 때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날이 빈번해 졌다.
그러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술에 빠져서 14일 동안 마신 술이 250병 정도였던 것 같다. 가끔 기억이 돌아올 때는 술병을 지루에 담는데 2자루가 넘었다.
술을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날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었고 집으로 친구 3명이 왔었다. 한 친구는 술을 마시다 지금은 안마시는 중이고 또 한 친구는 매일 죽겠다 소리만 하고 또 다른 친구는 소주2잔만 마셔도 까무라치는 친구인데 친구의 딸과 우리 딸이 잘 알고 있던 터라 갑자기 이 친구들이 죽으면 내가 원망을 듣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큰딸에게 용기를 내어 “나 술 끊게 병원에 보내줘” 부탁을 했고 그날 소주10병을 모두 마시고 나서 옷을 그냥 입은 채로 슬리퍼를 신고 병원에 입원을 했다. 처음 접하는 병원 생활은 그냥 가만히 있으며 찬찬히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가면서 담당 의사 선생님과 많은 상담을 했었다. 그리고 스스로 조금씩 술이 왜 나쁜지를 알게 될 즈음 갑자기 퇴원하라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밖으로 나가 보니 앰블런스가 있어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가겠다고 한 후 그곳은 너무 열악한 환경의 병원이라 처음에는 다툼도 많았고 이기적이 되었고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티던 중 알코올교육이란 것을 듣게 되었다.
교육을 듣고 ‘아 술이 이렇게 나쁘구나!’깨닫게 되었고 스스로를 깨우쳐 가면서 병원의 복지사 선생님과 더욱 더 많은 질문과 답을 들으며 ‘내가 변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우가 목욕을 전혀 하지 않거나 또, 못하는 분들을 하나씩 씻겨 주면서 자신에 대해 깨달아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함께 있는 사람들과 동화되었고 병원 생활에 적응해 나갈 때 즘 딸들이 입원 몇 개월만에 병문안을 와서 했던 말이 가슴에 너무나 와 닿았다.
”우리 아빠는 젊었을 때 너무 좋은 아빠였는데 왜 이렇게 변한거야“하는 그 소리가 내 가슴을 울리는 커다란 북소리 같았다.
’아! 나도 한때는 좋은 아빠였었구나‘하고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퇴원하면 남은 인생을 우리 딸들한테만큼은 더 좋은 아버지로 거듭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병원 안에서 보호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보호사 일을 하면서 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지만 술을 마시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살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약속‘인데 그 약속만은 지켜 딸들이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주자고 결심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필이면 첫 외출날이 나의 생일이었다. 그날이 일요일이었고.... 인천에 살고 있는 막내 여동생이 남편과 함께 생일을 축하해 준다고 하였고 갑자기 둘째딸이 생일 축하 장소에 온다는 것이었다. 딸이 인처까지 온다는 소리에 걱정을 했는데 알고 보니 딸이 못난 아버지의 생일이라고 해서 보온병에 미역국을 담아서 온 것이었다. 난 그때 울컥해서 일부러 눈물을 감추려고 미역국을 통째로 다 마셔버렸다. ’못난 이 아빠를 이렇게 사랑해 주는구나‘하고 그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 삶을 다시 찾아보자고 결심하고 열심히 일을 하던 중에 병원의 다른 보호사들이 밤에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 너무 싫었고, 결국 보호사 일이 나에겐 보람 있는 일이었으나 일을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부산으로 내려와 술을 끊기 위하여 A.A.도 가보았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하는 말이 중독센터에 가보라고 하여 센터로 전화를 했고 센터를 이용하게 되었다.
센터를 이용한 지가 거의 2년 가까이 되었고 그동안 난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될 때마다 교육에 참여하고 있으며 중간 중간에 일도 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친구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말리는 편이다. 또는 적게 마시라고하고 즐겁게 마시라고 하고 웃으면서 마시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날이 내 큰딸이 아버지 생일이라고 밥을 함께 먹자고 전화를 해 준 날이다. 회복수기를 쓰지 않으려 했으나 갑자기 센터의 선생님들이 생각이 나서 마음을 먹고 글을 써보기로 결심하였다. 두서가 없는 나의 이야기이지만 이제부터 평생 단주하기 위한 결심을 새기기 위하여 이 글을 통해 다시 한번 결심하고 다짐한다.
♣ 단주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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